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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과학화에 눈뜬 안과의사 공병우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세벌식 한글 타자기인 ‘공병우 타자기’를 모르는 사람도 서울 광화문 우체국 뒤편에
 있는 ‘공안과’라고 하면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공안과 초대 원장이었던 공병우 박사는 “눈병을 고치는 일이나 연구는 외국인이 해줄 수 있지만 한글 과학화는 한국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병원 운영을 둘째 아들에게 맡기고 50년 넘는 세월을 한글 과학화 연구에 바쳤다.

잘 나가던 안과의사가 갑자기 한글 과학화에 눈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1938년 서울 안국동에 한국 최초의 안과 병원을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에게 뜻밖의 환자가 찾아와 한글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늘어놨다. 알고 보니 독일 베를린종합대학에 조선어과를 창설하고 강사로 재직하면서 박사학위를 마친 한글학자 이극로였다. 이 만남을 계기로 공 박사는 한글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공 박사는 곧바로 국내 최초로 시력 측정을 위한 ‘한글 시력표’를 제작했다. 때마침 광복이 되자 일본어로 된 자신의 저서 ‘신소안과학(新小眼科學)’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한글타자기 개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미 두세 가지의 한글타자기가 개발돼 있었지만 널리 쓰이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세로쓰기로 책이 출판됐기 때문에 이들 타자기는 가로로 글자를 찍어 종이를 90도 왼쪽으로 돌려세워 세로로 읽어야 했다. 따라서 글자를 다 치고도 손질이 많고 속도가 느렸다.


<공병우 박사. 사진 제공. 동아일보>


그래서 공 박사는 1949년 잔손질 없고 속도 빠른, 가로 찍어 가로 쓰는 한글 타자기를 개발해 냈다. 1950년에는 더 발전된 형태의 ‘공 속도 한글타자기’ 시제품 3대를 제작했다. 그의 한글타자기는 전쟁이 터지자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문맹률이 80%가 넘던 시절, 수많은 병사들이 무명 전사자로 처리됐다. 이에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공 박사의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긴급 도입했다.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재직하던 한글학자 최현배는 전쟁 중에도 부산에서 공병우 타자기를 이용해 ‘한글 타자기 경연대회’를 열 정도로 공 박사의 한글타자기는 혁명적인 발명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공 박사가 개발한 세벌식 타자기는 자음을 오른쪽에, 모음을 왼쪽에, 받침을 왼쪽 가장자리에 옮긴 것이었다. 글자를 찍으면 받침이 있는 글자는 세로 길이가 길고, 받침이 없는 글자는 세로 길이가 짧았다. 우리가 요즘 흔히 보는 안상수체나 샘물체와 비슷해 이 글씨체에는 ‘빨랫줄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68년 과학기술처가 글자 입력은 세벌식보다 훨씬 느리고 복잡하지만 글자 모양이 네모 반듯하다는 이유로 네벌식 타자기를 표준 자판으로 공표하면서 공병우 타자기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컴퓨터에 두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채택했다.

이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벌식 자판을 쓰고 있다. 윈도우, 리눅스, 매킨토시 등 많은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세벌식 자판을 지원하지만 국가 표준 규격으로 세벌식이 채택되지 않아 두벌식 입력 방식에 비해 사용자의 수가 크게 적다.

그렇다면 두벌식과 세벌식 자판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두벌식 자판은 키보드의 왼쪽에는 자음, 오른쪽에는 모음을 배치해 ‘자음-모음’이나 ‘자음-모음-자음’ 순서로 글자를 입력하도록 돼 있다. 된소리와 일부 모음(ㅒ, ㅖ)은 시프트키와 자음을 함께 눌러 입력할 수 있고, 겹자음과 겹모음은 두 자판을 연속해서 눌러 입력할 수 있다.

<세벌식 자판은 자음을 오른쪽에, 모음을 왼쪽에, 받침을 왼쪽 가장자리에 옮긴 것이었다. 글
자를 찍으면 받침이 있는 글자는 세로 길이가 길고, 받침이 없는 글자는 세로 길이가 짧았다.
사진제공 동아일보.>


그러나 두벌식 자판을 사용하면 도깨비불 현상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우리’를 치는 동안에 ‘울’자가 나타났다 ‘ㅣ’를 치면 ‘우리’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울’자까지 치면 아무 일도 없지만 ‘ㅣ’를 치면 잠시 뒤 ‘우’자가 찍히는 시간차가 생기는 불편함이 있다. 반면 세벌식 자판에서는 초성이 할당된 자판과 종성이 할당된 자판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기지 않는다.

두벌식 자판은 세벌식 자판과 비교해 사용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의 피로가 많이 쌓이고 타자속도도 더 느리다. 두벌식 키보드의 맨 윗줄 자판을 누르는 비율은 20%나 되지만 세벌식 키보드는 맨 윗줄 자판의 사용이 1%에 불과해 자판의 구성이 훨씬 인체공학적이다.

특히 세벌식은 ‘모아치기’가 가능하고 ‘연타’가 적어 속기용 한글 입력 방식을 제외하고는 글자 입력 속도가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아치기란, ‘한’이란 글자를 ‘ㅎ+ㅏ+ㄴ’순으로 입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한’으로 모아주는 것을 말한다. 같은 손가락이나 같은 손으로 연속해서 치는 연타 역시 타자속도를 떨어트리는 요인인데, 세벌식이 두벌식보다 연타가 적다.

공 박사는 1995년 88세를 일기로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더 과학적이고, 더 빠르고, 더 외우기 쉬운’ 자판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만든 한글문화원은 1980년대 중반부터 매킨토시 컴퓨터를 직접 활용해 한글 세벌식 글자꼴을 개발했으며, 훗날 아래아한글의 개발을 함께한 박흥호와 함께 세벌식 자판배열을 완성하고 세벌식입력기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공 박사는 고령의 나이에도 젊은 프로그래머 강태진, 정내권, 이찬진 등에게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하도록 지원했다. 한자와 한문을 혼용하던 당시, 그가 가진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인이 즐겨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과학화를 통한 길뿐이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세종대왕은 워드프로세서가 없던 시절에 한글을 창제했지만, 공 박사는 한글을 우리 시대에 걸맞도록 재창조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번 한글날에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공병우 박사의 뜻도 기리는 것이 어떨까.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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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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