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고려궁지이야기


오늘로 다섯 번째소개가 되네요.. ^^

 

오늘의 강화도 소개지는 바로바로바로..............고려궁지입니다

'산천지기'라는 블로거님이 고려궁지를 너무 잘 소개해 주셔서..

이분의 글을 블로깅해오게 됐습니다.

'궁'이라는 느낌의 이미지 때문에 딱딱하고 무거운 곳일 것 같았는데..

이분의 글을 보니 편안한 안식처 같은 느낌의 궁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

그렇다면, 여러분 마음 속의 옥토끼 우주센터는 어떤 이미지 인가요?? ^^

<script>Ku.SetClipboard.initFlash( '/versioning/common/js/clipboard-2944.swf' );</script> id=SetClipboardModule77974375
 ㄱ

 


섬 전체가 지붕없는 박물관 강화도 

우리나라에서 다섯째로 큰 섬 강화도는 오랜 세월 동안 질곡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본 우리나라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던 섬이며 역사적 사건은 고려시대 몽고와의 항쟁의 근거지가 되었고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유적, 전등사, 교동도와 화개사, 석모도와 보문사, 마니산과 참성단 등 산과 섬, 바다가 어우러진 곳이다. 둘러볼 곳이 유난히 많은 강화도는 호국의 전적지가 모인 곳이기도 하다.  
 

고려 고종 이후 외적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뒤 39년 동안 머물렀다. 신미양요(1871년) 당시 마지막까지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이고, 조선의 강제 개국을 부른 강화도조약은 운요호사건(1875년)의 발발지인 초지진 전투에서 시작됐다.인물로는 이규보, 권율, 김교창, 이건창, 김상용, 양헌수등이 배출되었다.
문화재는 국가 지정 문화재만도 보물 제 10호인 오층석탑을 비롯해 25점이 있고 지방 지정 문화재는 39종이나 된다. 마니산과 신선놀음, 성토닦기 노래 등 많은 설화와 민요가 전해지고 있으며 씨름굿, 안택굿, 별신굿 등 마을민의 평안함을 비는 의례가 있었다.  
천연기념물로 갑곶리 탱자나무(제78호), 사기리탱자나무(제79호)가 지정되어 있다. 마니산의 단풍과 전등사, 고려산,낙가산,혈구산등이 있으며 전적지와 더불어 많은 역사적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산물로는 6년근 인삼, 화문석, 강화순무, 강화육미(농어, 숭어, 백하, 문합, 낙지, 밴댕이)의 맛이 유명하다. 세계 5대 갯벌안에 드는 자연생태계 또한 강화도의 자랑거리이다.
 

 

강화의 작은 궁궐 고려궁지

이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 승평문 

왕궁의 정 남문 이었다. 즉 지금의 선원비각 주위에 있었다 하며 왕이 거동할 때에 전용 하였고 환궁할 때에는 조정대신 이하가 문 밖에서 하마(下馬)하여 영입하도록 되었다.

  이 문루는 삼문으로 되었으니 가장 광대하였고 오직 임금만이 출입하며 외국사신도 옆문으로 통용케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하세한 후 다음해 태자(太子) 전이 몽고로부터 환도함에 있어 승려(僧侶) 대강화상(大康和尙)과 함께 승평문(昇平門)으로 들어오게 하셨다고 전례에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궁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官廳里)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로서 사적 제133호.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이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基壇)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이 세워졌으며, 1976년에는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하였다.  

 


▲ 고려사절요에 최우가 이령군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궁궐의 풍모는 송도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
각 건물의 명칭을 전부 송도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모두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고려궁지는 정문인 승평문과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고 동쪽에는 광화문이 있었다.

 

 


▲  강화 동종 (보물 제11호) 

강화동종은 1685년(숙종 11)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후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지금의 전등사 뒷산)에서 다시 주조한 종이라고 한다. 원래 고려궁터 진입로인 김상용 선생 순의비 자리에 있었는데, 1977년 궁터를 보수 정화하면서 궁터 내로 옮겼다. 

조선시대에 강화성문의 여닫는 시각을 알리는데 쓰던 종으로 높이 186.5㎝, 밑지름 141㎝, 두께 15㎝, 총 중량 3,912㎏의 큰종이다. 정상이 반구형이며, 그 중앙에 용뉴가 붙었는데, 용뉴의 형태는 유자(U字)를 엎어놓은 모양에 쌍룡이 좌우로 향하게 조각되어 있으나 한국종의 특징인 용통이 없다. 종몸 가운데로 두 줄의 두드러진 띠가 둘려져 상하로 양분되어 윗부분에는 상대와 분리되어서 4개의 유곽이 배치되었다. 유곽대는 꽃무늬로 장식되었고 그 안에 아홉 개의 연꽃이 새겨져 유두를 표현하였다. 종 아랫부분에는 당좌가 없고 명문만 주조되어 있으며 하대는 보상당초문으로 장식되었다. 주조된 명문에 의하면 종의 주조연대는 1711년(숙종 37)이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느낌이며 조선시대 종의 특색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탈취하여 가려고 갑곶으로 운반하다가 너무 무겁고 우리군의 추격에 포기하고 갑곶리 중도 토끼다리 근변에 버리고 철수했다고 한다. 원래 강화동종은 강화부 종각에 있었으나, 균열이 심해져서 타종할 수 없게 되자, 1999년 10월에 강화동종과 같은 모양의 종을 만들어 강화부 종각에 설치하고, 강화동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겼다. 

 

 

▲ 외규장각 

1781년 정조(正祖)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일부 서적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프랑스군이 이때 약탈해 간 도서 가운데 2001년 현재까지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도서는 191종 279권에 달하며, 이 중에는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의 유일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약탈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이 이 도서를 한국에 돌려주지 않아 지금까지도 양국 간에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

 

1993년 9월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에서 상호 교류와 대여라는 차원에서 영구 임대 형식으로 프랑스에 임대하기로 합의하였다가, 2000년 10월 다시 양국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을 '대등한 문화재 교환 전시' 형식으로 2001년까지 한국에 반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반환 협상이 연기되거나 프랑스 측에서 계속 협상을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의 힘을 빌리더라도 무조건 반환시켜야 한다는 역사·학술·시민 단체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이 확산되는 등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으로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고, 이 밖에 이궁(離宮)과 가궐(假闕)도 곳곳에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화산성 사적 제132호

고려궁지 앞길로 산비탈을 올라가면 고려산성이 있다.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착공하였는데,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 성은 내성(內城)·중성·외성이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3,874자(1,174m),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쌓았고, 외성은 1233년에 지었다. 이 성들은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仙源面)의 토성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가 3만 7070자(1만 1232m)였다. 그러나 1270년 다시 개경(開京)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서문인 첨화루(瞻華樓)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세웠고, 남문인 안파루(晏波樓)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했고,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세웠고,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는 200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암문(暗門) 4개소와 수문(水門) 2개소가 남아 있다. 

 

 

 

이 산성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임진강과 북녁땅이 보이고 물맛이 좋은 약수터가 있다.

고려궁지의 인근에는 오읍약수터와 관청리 은행나무가 있는데, 은행나무는 고려궁지 대형 주차장 옆 30m 지점에 있다. 그리고 약수터는 고려궁지 입구에서 왼쪽으로 고려궁지 담을 끼고 시멘트 포장된 오르막길을 5분 여 걸어서 강화산성 북문을 지나 다시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물맛이 아주 좋고 또 산책삼아 걷기에 좋아 인근의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출처] 강화 고려궁지|작성자 산천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