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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혁명의 첨병, 분자 나노현미경 탄생 이야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http://scentkisti.tistory.com/194)
글 : 서영덕 한국화학연구원 융합바이오센터 분자고등검지그룹장


“우리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헤어져.” 
가슴이 철렁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나 인기 연예인 부부의 파경 소식이 아니다. 박사과정을 마친 후 부푼 가슴으로 시작했던 스위스 연방공대(ETH Zurich)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화학과 물리를 합친 ‘나노분광학’을 전공한 덕분에 유난히도 힘들고 길었던 박사과정 내내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왔던 아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1990년대 후반 아내에게서 이런 폭탄선언을 들었을 당시 필자는 6개월째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신세였다. 실험실에서 ‘나노라만’ 신호를 얻는데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구공과 당구공이 서로 부딪히면 충돌 전후의 에너지가 변하지 않는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탄성충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당구공과 진흙공이 충돌하면 진흙공에 에너지의 일부가 흡수돼 충돌 전후의 에너지가 서로 차이가 난다. 이를 ‘비탄성충돌’이라고 한다. 

생체물질에 레이저를 쏘면 내부에서 생체분자와 레이저의 광자가 부딪히는 비탄성충돌이 일어난다. 이때 생체분자는 진흙공, 광자는 당구공에 해당하는데 충돌 후 생체분자가 레이저의 에너지 일부를 흡수한다. 생체분자의 구조에 따라 충돌 전후의 레이저 에너지가 조금 달라지는데 이 차이를 측정하면 광자가 어떤 생체분자와 부딪혔는지 알 수 있다. 광자와 생체분자의 충돌 전후 에너지 차이가 바로 ‘라만신호’다. 즉 라만신호는 몸 안에 있는 생체분자를 자세하게 분석하는데 쓰인다. 

분석할 생체물질의 크기가 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 수준이면 일반적인 원자현미경으로도 얼마든지 라만신호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마이크로라만’ 신호만으로는 생체현상 연구에 한계가 있다. 

생체물질을 분석할 수 있는 분해능이 나노미터(1nm=10억분의 1m) 크기 정도로 작아야 생체분자가 몸속에서 이루고 있는 화학결합이 무엇이며 얼마나 센지 등을 알아낼 수 있다. 나노반도체나 차세대휴대폰 동영상 장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나노 불순물을 분석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노라만 신호를 분석하려면 결국 직접 필요한 장치를 개발해야 했다. 말은 쉽지만 나노라만 신호라는 게 형광 같은 다른 분광 신호의 100만분의 일도 안 될 정도로 아주 미약하다. 세포에 레이저를 쪼면서 나노라만 이미지 한 장을 얻는 데 무려 9시간까지 걸리곤 했다. 그렇다고 성급한 마음에 레이저를 너무 강하게 쪼면 마치 라식수술 할 때처럼 세포가 벗겨지거나 더 심하면 까맣게 타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나노라만 신호를 분석하려면 세포를 중간에 두고 위에 있는 원자현미경의 탐침과 아래에 있는 레이저의 초점을 서로 1나노미터 정도로 아주 정확히 맞춰야만 한다. 그런데 레이저의 초점 크기가 약 200나노미터 내외로 워낙 작아서 이것을 10나노미터도 채 되지 않는 원자현미경 탐침 끝부분의 중심과 잘 맞아 떨어지게 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마치 양궁경기에서 화살촉 끝부분을 과녁의 정중앙에 정확하게 맞히는 것과 같다. 

어쩌다 정확하게 맞춰도 실험실 내부의 온도나 습도, 소음, 진동 등 주변 환경 변화에 따라 다시 어긋나 버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당시 우리 실험실이 취리히 시가전차가 지나가는 철로 바로 옆 지하실에 있었다. 그나마 시가전차가 끊길 즈음인 자정부터 아침까지가 그래도 신호가 어느 정도 나오는 때라 어쩔 수 없이 밤새도록 실험실에 앉아 있곤 했다. 

당시 아내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둘째 아이 육아 스트레스에다 대부분의 이웃들이 영어를 못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예상치 못했던 언어장벽을 겪고 있었다. 달력 사진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멀쩡한 사람도 우울하게 만드는 침울하고 긴 스위스의 겨울 날씨, 저녁 8시 이후에는 설거지도 못하고 쥐죽은 듯 조용해야 하는 스위스식 주거규칙, 어쩌다 해먹는 한국음식 냄새를 윗집에서 못 견뎌하는 등 너무나 다른 문화 충격들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을 때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내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발등에 떨어진 가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연구를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좀 더 빨리 나노라만 신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고안한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분자 나노현미경(MINE, Molecular Integration Nanoscope)’이다. 

분자 나노경은 탐침 끝부분과 레이저 초점을 컴퓨터로 정확히 맞출 수 있고, 은나노 탐침을 써서 미세한 나노라만 신호도 획기적으로 증강시킬 수 있는 차세대 융합 장비다. 생체분자의 물리적인 3차원 나노 형상뿐 아니라 분자화학적 분광 정보까지도 얻을 수 있다. 분자 나노경의 등장으로 과학자들은 이제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나노 세계의 다양한 분자화학적 현상들을 선명한 컬러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쓴이가 분자 나노경(MINE)을 관찰하고 있는 모습. 미세한 생체분자의 신호를 포착해 분자
화학적 3차원 영상을 얻을 수 있다. 사진제공 한국화학연구원>

앞으로 분자 나노경은 알츠하이머병이나 백혈병 같은 난치성 질환의 근본 원인이 되는 유전체 또는 단백체의 병리현상 연구, 암세포를 죽일 수 있는 바이오의약품 개발에 활용될 전망이다. 

보통 10년 이상 걸리던 글리벡 같은 신약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시키고, 많게는 2조원까지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신약개발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현미경(왼쪽)과 분자 나노경(MINE)으로 본 유방암 세포. MINE으로 찍은 사진은
선명한 컬러로 나타나며 20nm 크기의 미세 구조까지 구분할 수 있다. 사진제공 한국화학연구원>

이제는 희미한 옛 추억이 됐지만 아내의 그 때 그 한 마디가 당시에는 분자 나노경을 개발해야만 했던 절박한 동기가 됐다. 현재는 분자 나노경에 이어 수 펨토초(1펨토초=10조분의 1초) 안에 일어나는 생체물질의 변화까지 볼 수 있는 성능을 연구 중이다. 또한, HD급 디스플레이소자에 대한 나노분석 기능 등을 결합해 새로운 첨단 나노 검사장비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 하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이 보편화 되면 난치병 환자들은 더 빠르고 저렴하게 신약을 투여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만들어 낸 신기술이 의학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과학은 언제나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그래서 과학이란 학문은 더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글 : 서영덕 한국화학연구원 융합바이오센터 분자고등검지그룹장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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